조선 최고 라이벌 이순신(李純臣)과 원균(元均)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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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 최고 라이벌 이순신(李純臣)과 원균(元均) 이야기

월봉 김오준
[뉴스와이] 조선 14대 임금 선조(宣祖) 이균은 왜군과 강화교섭이 진행될 무렵부터 이순신의 능력과 자격을 문제 삼은 기록이 등장한다. 이순신을 원균과 비교하며 두 장군을 저울질하며 왕이 라이벌 조성에 앞장선 셈이다. 왕도수업(王道修業)없이 등극한 방계출신(傍係出身)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치 못한 채, 자기보다 뛰어난 세자 광해군(光海君)과 재주있는 신하에게 의심과 질투를 보인 졸군(卒君)의 대명사다.
1596년 6월, 선조가 어전회의에서 이순신에 대해 하문(下問)했다. "이순신이 처음에는 분전했으나 그 뒤에 흩어진 적을 부지런히 잡지 않는가 하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는 일도 없어서 내가 늘 의심했소." 서인 출신 신임 좌의정 김응남은 선조의 의도(意到)를 알아차리고 맞장구쳤다.
'원균이 개전(開戰)초기에 장수를 보내 이순신을 불렀지만 오지 않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먼저 군사를 요청했는데도 전공이 이순신에게 돌아가 두 장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공을 세운 사람인지 모르겠소." "저도 의심이 갑니다. 이번에는 원균을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순신은 원균의 무과 급제 7년 후배로 몇차례 연합작전을 펼쳤으나 이순신이 지휘권을 행사했고 공(功)은 늘 이순신에게 돌아갔다고 원균은 불평했으며 1593년 8월,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으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균이 이순신의 지휘를 받게 되자 더욱 앙금이 깊어졌다 전한다.
이때 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을 빚어 충청병사(忠淸兵師)로 전임되었다. 명종이 후사(後事)없이 죽자 안빈(安賓)이 낳은 중종의 서자(庶子) 덕흥군의 셋째 아들 균이 갑자기 왕위에 올랐다.
천연두를 앓아 곰보얼굴에 변덕과 의심이 심하고 잘난척하기를 좋아한 찌질한 군왕으로, 명나라 진린도독의 주선으로 명나라에서 이순신을 도독에 명한다는 가짜뉴스를 접하고부터 이순신에 대한 선조와 서인들의 질투가 부쩍 심해 순신에게 트집을 잡아 결국에는 한양으로 압송해 40일간 심문끝에 백의종군케 했다. 왜란이 끝나자 공을 세운 무신들에게 선무공신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중 1등급은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공신의 등급은 한 등급이 낮아질수록 칭호의 글자가 두 글자씩 줄어든다.
1등급 공신을 받은 사람은 이순신, 권율, 원균 세 명뿐이다.
이때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원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데도 우격다짐 끝에 원균을 1등공신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껄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고 전한다.
강화조약이 결렬되자 1597년 왜놈들은 1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재차(再次) 쳐들어왔다.
정유년 7월 초에 왜군함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고 이중 일부는 여수 웅천으로 진격했다.
도원수(都元首) 권율은 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왜적을 공격하라고 하자 원균은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공격을 명했으나 군량미 200여 석과 전선 수십 척을 잃고 물러났다.
원균은 한산도 운주당에서 칩거하며 술에 취해 싸우려 하지 않았다.
체찰사 권율은 명령불복종죄를 적용, 원균을 불러다 곤장을 치고 직접 전투에 나서라고 명했다. 원래 장군은 발바닥을 맞아야 하는 규정을 어기고 수군 총사령관이 곤장을 맞는 수모끝에 원균은 전선 300여 척을 동원해 출전했으나 왜군들의 전술에 말려들어 전함 300척과 조선 수군 20.000여명을 잃고 대패했다.
육지로 도망가던 원균은 왜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왜적은 하동, 광양, 남원 등지로 진출했다. 화겁한 선조는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임명했다. 왜적은 서해로 진출하려고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명량해전에 맞붙은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330여 척의 적선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후(前後)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은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고자 선조에게 인물을 추천했다 권율과 이순신이 추천되었다.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 류성룡은 이순신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추천했다.
동인 세력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자 정철과 윤두수 등 서인 세력은 원균을 밀었다. 이때부터 라이벌이 되었다. 곡절을 겪은 끝에 이순신이 전라좌수사가 되고 그 뒤 원균도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수군은 전함을 불사르고 도주하는 어처구니 없는 행위를 자행했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원균을 우습게 본것 같다.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후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日記)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8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은 더욱 벌어졌다. 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병사로 발령했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592년 4월 20일,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하면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원균은 소비포 권관 이영남을 보내 출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 명령이 없다며 원균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된것이다.
먼저 이순신과 원균의 개략적 삶을 살펴보면, 충무공(忠武公) 여해 이순신은 본관은 덕수 이씨로 1545년 3월 8일 한성에서 출생하여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해전에서 왜군을 23차례 격파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22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1576년 봄 무과 병과에 급제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후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여 나주출신 나대용 형제의 도움을받아 거북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조련했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8일 옥포 앞바다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대첩에서 적선을 크게 격퇴하여 왜군의 전의를 상실시켰다. 1593년 8월 삼도수군 통제사 가 되었고 1595년 왜군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으나 곧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고,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한 명량대첩을 이끌어 왜군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 마지막 전투였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 진중에서 기록한 난중일기가 있다.
평중(平仲) 원균(元均)은 본관이 원주원씨로 1540년(중종 35) 2월 12일 출생하여 1597년(선조 30) 8월 27일 칠천량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1569년 무과 을과에 급제했다.
경상우수사를 지내던 중 임진왜란을 맞이하였다. 이후 파직된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랐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임자가 공들여 육성해 온 조선 수군이 와해되고 본인도 전사했다. 이 패배로 인해 당시 전황이 매우 어려워졌으며, 정유재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원균은 일찍이 이일과 함께 북방의 여진족을 토벌했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여 배설, 이순신, 이억기 등과 함께 남해를 지켰다. 하지만 그는 전란 초기에 엄청난 왜군의 기세에 놀라 전선을 침몰시키고 퇴각함으로써 경상도 일대의 방어망이 붕괴되었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했던 전란 말기에는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궤멸당하는 등 두 차례의 결정적 패배했다.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한 기록 중 먼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이 이끌었던 경상도 수군에 대한 편견된 기록이 보인다.
'경상장졸 개오합지병야 일일일참즉 군령보전'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군률을 어긴 자들의 목을 하루에 한 사람 쳐야 군률이 보전된다"
慶尙徒 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怯奸又諶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인들은 무리를 지어 머리를 깎고 왜옷을 입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 전라지방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왜적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
심지어는 노인 어린이 부녀자의 머리를 베어 왜의 장수에게 진상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순신은 한 끼 식사로 10공기에 닭 7마리, 조기 5마리를 먹는 대식가로 소문난 원균의 경상도 수군들의 해이한 군율을 비난했다.
이순신은 경상 우수사 원균과는 당색이 다른 동인과 서인이였다.
그래서인지 서로를 견제하고 몹씨 싫어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순신이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적나라히 드러낸 원균에 관한 내용이 많다.
칠천량해전이 일어나기 전 1597년 5월 8일자 일기에 ​'원균이 수하 아전을 육지로 심부름을 보내놓고는 그의 아내와 사통하려 하였다. 아전의 아내는 원균이 기를 써도 따라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런 자가 온갖 꾀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나의 운수로다. 원균이 나를 헐뜯기 위해 쓴 글은 너무 많아 말에 얹혀 조정으로 보내질 정도로, 그 짐이 서울길에 잇닿았을 지경이다. 그렇게 나를 헐뜯는 짓이 날이 갈수록 심하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며 원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찼다.
이 밖에도 1593년 2월 28일, 원균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으니 황당하다.
3월 2일, 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5월 14일, 원균이 함부로 말하고 사람을 속이니 모두가 분개하였다.
5월 21일, 원균이 거짓 공문으로 군사들을 속이니 정말 흉측하다.
5월 24일, 중국 화전을 원균이 혼자 쓰려 꾀를 내니 우습다.
5월 30일, 위급한 때에 원균이 계집을 배에 태우고 논다.
6월 10일, 원균이 흉계와 시기 가득한 편지를 보내왔다.
6월 11일, 원균이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한다.
7월 21일, 원균이 흉측한 흉계를 냈다.
8월 2일, 원균이 나를 헐뜯어 망령된 말로 떠드니 어찌 관계하랴!
8월 6일, 원균은 걸핏하면 모순된 말을 하니 우습고도 우스울 따름이다.
8월 7일, 원균은 항상 헛소문 내기를 좋아하니 믿을 수가 없다.
8월 19일, 원균은 음흉하고 그럴 듯하게 남을 속인다.
8월 26일, 원균이 음흉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해 해괴하였다.
8월 28일, 원균이 와서 음흉하고 간사한 말을 많이 내뱉었다.
8월 30일, 원균은 참으로 흉스럽다고 할 만하다.
9월 6일, 하루 종일 원균의 흉측스러운 일을 들었다.
​1594년 1월 11일, 원균이 취해서 미친 말을 많이 했다. 우습다.
1월 19일, 원균이 남들이 마음에 두었던 여자들 모두와 관계했다.
2월 18일, 원균이 심하게 취해서 활을 한두 번 밖에 쏘지 못하였다.
3월 3일, 원균의 수군들이 우스운 일로 매를 맞았다고 한다.
3월 5일, 장수들이 이야기하던 중, 원균이 오자 가버렸다.
3월 13일, 원균이 거짓으로 왜군 노릇했던 자의 목을 잘라 바쳤다.
4월 12일, 원균이 미친 듯 날뛰니 모두가 무척 괴이쩍어 했다.
1595년 2월 20일, 원균의 악하고 못된 짓을 많이 들었다.
2월 27일, 원균이 너무나도 무식한 것이 우습기도 하다. 이처럼 이순신은 원균을 42회 가량 좋지 않게 기록했다. 연도별로 보면 1593년에 17회, 1594년에 11회, 1597년에 12회로 집중돼 있다. 1592년, 1595년, 1596년에 원균에 대해 적은 기록은 거의 없다. 1595-1596년은 원균이 충청병사로 옮겨가 수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원균과 동암공 이영도가 나눈 대화 내용을 보면 원균도 마찬가지다.
원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오직 순신에게 부끄러움을 설욕하였다는 사실이 통쾌합니다 그려.
동암공: 영감이 능히 마음을 다해서 적을 무찔러 그 전공이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그저 순신과 교체하여 통제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통쾌하게 여기는 것만으로는 그에게 설욕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오.
원균: 내가 적을 만나서 싸우게 될 때, 거리가 멀면 편전을 쏘고 가까우면 장전을 쏠 것이오. 또 칼로 적을 칠 것이며, 칼이 부러지면 단신으로 적을 쳐버릴 것이니 이기지 않을 리가 있겠소?
동암공: 대장이 된 위치에서 칼을 쓰고 단신으로 적과 싸운다니 그게 과연 옳은 일이겠소?
​동암공은 원균이 떠난 뒤에 혀를 찼다고 한다. 이 대화를 보면 원균은 5년 후배 이순신에게 뒤쳐져 있다가 이제야 그를 꺾었다는 희열감 이 잘 드러난다. 그 동안의 부끄러움을 설욕했다는 통쾌함에 젖여 삼도수군통제사의 임무에 대한 인식보다는 그 자리만 탐했으며 목표 의식이 없는 통제사 원균 휘하의 조선수군의 결말을 보여준 대목이다.
​이순신 장군을 몰아내고 원균은 3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진중에서나 전투에서도 이순신 장군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하여 처음에 취한 조치가 전임자 이순신이 시행했던 모든 규정을 바꾼 것이다. 통제사로 부임한 후 처음 취한 조치는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하며 작전을 논하던 ‘운주당’에 첩을 거주케 한 후 두 겹의 울타리를 쳐놓고 안팎을 막아 사적 영역을 구축해 밖으로 나오지 않아, 평시에는 참모나 장수들은 전황이나 적정을 보고할 수 없었고 전임 이순신 에게 신임을 받았던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전보발령을 냈고 이순신이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지리를 익히며 전투했던 경험과 능력을 가진 자라면 신분에 관계없이 발탁한 반면, 원균은 이순신이 신임했다는 이유로 쫓아내고 전투경험없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선조와 조정에서는 이 같은 사정도 모른채 원균이 하루 빨리 적의 소굴 부산포를 공격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원균은 공격하겠다는 보고는 올리지 않고 전임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행적에 관한 보고서만 올렸다.
1597년 2월 28일자 보고서도 이순신 장군이 부산포 앞바다에서 위세를 과시하다가 큰 창피를 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가 재촉하고 체찰사 권율이 강력히 명하자 원균은 가덕도 앞바다로 출정해 약간의 적을 살상(殺傷)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유능한 부하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보고를 받은 비변사에서는 원균에게 퇴각하지 말고 적을 재차 공격하라는 어명을 내려 달라고 선조에게 건의해 공격명령이 내렸으나 원균이 출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대노한 권율이 7월 11일 원균을 사령부로 불러 출전을 명했다. 그래도 원균이 응하지 않자 원균에게 곤장쳤다.
문관위주의 비변사에서는 현지 실정도 제대로 파악치 못한채 통제사를 부하들 앞에서 곤장을 맞는 수모를 겪고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모든 함대를 집결시켜 7월 14일 이른 새벽에 부산포를 향해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건조된 전선까지 총동원된 최대 규모의 출진이었다. 척후선도 보내지 않고 사전 정보도 없이 대규모 선단을 출동시켰다.
바닷가 왜성에 주둔하던 왜군은 조선함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함대 이동 상황이 적에게 고스란히 노출되고 왜장 고니시에게 전해졌고 그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킬 작전을 치밀히 수립했다. 원균 함대는 어두워질 무렵 절영도에 도착하자 적선이 출현해 원균은 왜선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적선은 조선수군이 공격하면 달아나고 다시 출현했다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유인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한산도에서 아침 일찍부터 출발해 종일 노를 저어온 군사들은 피로에 지칠 대로 지쳐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하다 가덕도로 후퇴했다. 갈증에 시달린 군사들이 상륙을 요청하자 원균은 섬의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은채 허가하자 이미 왜군이 매복에 걸려 400명의 조선수군이 살육을 당하고 원균의 함대는 허겁지겁 퇴각해 거제도를 향해 도주했다.
사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원균은 칠천도에서 하루 밤을 지내기로 결정했다. 수하 장수들이 칠천도는 적과 지척이라며 먼 곳으로 후퇴하자고 건의하지만 원균은 무시했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전선12척을 모아 살짝 빠져 나갔다. 1597년 7월 15일 밤 고니시를 비롯한 왜군 수뇌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려 새벽녘 1,000여 척의 함대로 본격적 공격을 시작해 조선 수군은 대패했다.
원균의 후손들은 한 시대의 영웅이 모리배처럼 취급되는 것을 보다 못해서 수년 동안 역사적 사료를 모으고 분석해
조상인 원균이 이순신과 함께 남해를 지킨 동등한 장군으로서 전략적 측면에서 이순신과 몇 가지 대척점이 있었을 뿐,
개전(開戰) 초에 원균이 이순신에게 참전을 다섯 차례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고 주장하며 만약 원균의 요청대로 조선 수군이 함께 경상도 바다에서 싸웠다면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하며 또한 용맹한 장군답게 적을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는 당파전술로 많은 공을 세웠다는 변론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이자 유명한 학익진(鶴翼陣) 전술이 펼쳐진 한산대첩(閑山大捷)은 원균이 지휘하던 경상우수영의 앞바다에서 벌어졌고 원균의 경상우수영 수군이 왜선들을 좁은 견내량 물길로 유인하여 한산도 바다로 이끌어낸 다음에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포위하여 섬멸한 해전(海戰)으로 원균은 이미 거제 현령을 지내면서 거제 앞바다의 지리와 물길, 물때를 꿰뚫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1597년 8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비참하게 전사(戰死)했고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죽은자는 말이 없는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숙명적 라이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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